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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화 전쟁
 maximlee  | 분류 : 경제/경영 | HIT : 788 | VOTE : 118 |
베를린 올림픽에서 흑인이 100미터 달리기에도 우승하자 히틀러는 말없이 특별석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그러나 제시 오웬스(Jesse Owens)는 이런 소란을 모른 체했다. 오웬스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200미터 달리기와 계주에서 금메달 2개를 더 땄다. 열광한 관중 속에는 아디다스의 창업자 아디 디슬러도 있었다. 아디 디슬러는 가슴이 터질 듯해서 서있을 수가 없었다. 오웬스는 아디가 제작한 러닝화를 신고 있었다. 이러한 오웬스의 성공에 힘입어 다슬러 신발은 세계 톱 선수들에게 명성을 확고히 쌓았다. -바바라 스미트(비즈니스 칼럼니스트)

형제는 재산 분할을 둘러싸고 오랫동안 다투다가 1948년 4월에 마침내 완전히 갈라섰다. 다음 달 두 회사는 각가 설립 등기 신청을 했다. 아디 다슬러는 새 회사를 아다스(Addas)라는 상호로 신고했으나 아다 아다(Ada ada)라는 어린이 신발 제조업체가 이의를 제기하는 바람에 바로 거부되었다. 그래서 아디는 이름과 성을 합친 후 이를 ‘아디다스(Adidas)’로 만들었다. 루돌프 다슬러도 비슷하게 행동했다. 동생과 갈라선 직후에 루돌프는 ‘루다(Ruda)’라는 상호로 등기했다가 이름이 세련되지 않고 어설프게 느껴져 기억하기 쉬운 ‘푸마(Puma)’로 등기했다. 형제간의 다툼으로 온 가족이 갈라졌고, 그 후 10년간 골은 더욱 깊어졌다. -바바라 스미트

회사가 분리된 직후에 아디는 아내와 처제에게 몇 가지를 유심히 살펴봐달라고 했다. 두 사람은 공장을 돌아다니는 직원들을 재미있다는 듯이 관찰했다. 직원들이 신고 있는 검은 가죽 신발에는 옆에 흰 줄이 2개 내지 6개 있었다. 원래 이 줄은 신발의 옆면을 튼튼하게 하기 위해서 고안된 것이었으나, 아디는 밝은 줄이 들어간 자신의 신발이 다른 신발과 뚜렷이 구별된다는 것을 곧 알아차렸다. 두 줄은 다슬러 형제가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문제가 되었고, 또 사람들도 줄 때문에 루돌프와 다투고 싶어하지 않았다. 네 줄은 약간 너절한 느낌을 주었다. 3줄은 멋진 절충안이었고, 멀리서도 쉽게 눈에 띄었다. 그래서 아디다스 신발에는 3줄 로고가 사용됐다. -바바라 스미트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제프 헤르베르거는 축구 전문가들에게는 수수께끼였다. 그는 확고한 자신감을 공공연히 피력했고, 축구의 심오한 의미를 몇 마디 말로 표현해 기자들을 놀라게 했다. 예컨대 “축구는 90분간 진행된다.”나 “경기 종료 후가 경기 시작 전이다.” 또는 널리 회자되는 “공은 둥글다.”라는 말은 모두 헤르베르거의 말이다. -바바라 스미트

아디다스로서는 1956년 멜버른 올림픽을 놓칠 수 없었다. 멜버른 올림픽은 처음으로 전 세계에 텔레비전으로 중계되기 때문에 이 기업에게는 더없이 좋은 무대였다. 이제 갓 20살이 된 호르스트 다슬러(Horst Dassler)는 멜버른 올림픽에 출전할 선수들에게 아디다스 신발을 가져다주어야 했다. 호르스트는 지방의 아디다스 신발 상인을 찾아가서 아디다스 신발을 팔지 말고 무료로 나누어주라는 파격적인 제안을 내놓으며 상담을 벌였다. 당시만 해도 국제 스포츠계가 돈에 물들지 않았던 때라 이것은 예상하지 못했던 제안이었다. 공짜 신발을 신고 아센 트랙(타고 남은 석탄 찌꺼기를 깐 트랙)을 시험 삼아 달려본 후 그 신발을 자기가 가져간다는 것은 생각도 못한 일이었고, 선수에게는 엄청난 선물이었다. -바바라 스미트

가죽으로 만든 농구화 슈퍼스타는 모든 면에서 호평 받는 콘버스 제품보다 2배나 비싼 값에 미국에 공급되었다. 그런데도 가죽이 좋고 디자인이 뛰어나서 선수들은 기꺼이 웃돈을 주고라도 사려고 했다. 당시 대학농구팀에서 활약했던 빌 클로스 주니어는 “한 시즌을 나려면 콘버스가 4켤레 정도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슈퍼스타는 2켤레만으로도 족했습니다. 그것도 1켤레는 시즌이 끝난 후 여가 시간에 신었습니다.”라고 했다. 슈퍼스타의 효과는 대단했다. 슈퍼스타가 출시된 지 10년이 채 못되어 미국 프로 농구선수의 3/4이 아디다스 신발을 신었다. -바바라 스미트

70년대 초에 케테 다슬러는 새로운 엠블렘을 붙인 바지와 트리코트를 더 많이 내놓자고 남편을 설득했다. 이 엠블렘은 조그마한 디자인실을 운영하는 한스 픽이 고안했다. 픽은 헤르초겐아우라흐 사람을 위해 카탈로그를 만든 적이 있었다. 다슬러 부부는 밑에 가로줄이 붙은 잎 3개를 부채꼴로 배열한 엠블렘으로 정했다. 스웨덴 선수의 상의에 붙은 관을 연상시키는 이 로고는 드라이블라트(tri-blade, 세 잎)라고 불렀다. 의류는 뮌헨 올림픽 중에 아디다스에 엄청난 성공을 가져다주었다. 아디가 탐탁지 않게 여겼음에도 불구하고 의류사업은 곧 독일에서 전체 매출의 40% 이상을 차지했다. 스포츠의류에 대한 수요가 어마어마해서 아디다스는 주문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바바라 스미트

검은 대륙 아프리카의 여러 신생국가는 경제 문제로 씨름해야 했고, 보통 시민은 아디다스 신발 한 켤레도 구하기가 힘들었다. 몇몇 아프리카 나라만 스포츠용품 시장으로 고려될 뿐이었다. 그런데도 호르스트는 3줄 로고 제품을 아프리카에 알리고 회사의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엄청나게 투자했다. 몇 고문들은 호르스트가 박애주의에 따라 행동하고 있다고 확신했지만, 다른 고문들은 어려운 나라에서 친구를 찾기란 비교적 쉽고, 아프리카의 스포츠 담당자들이 국제 경기연맹에서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점에서 사장이 아프리카에 접촉하는 것을 회사에 매우 유익한 전략으로 보았다. -바바라 스미트

스포츠는 돈이 몰려든 후부터 스포츠가 상당한 상업적 가치를 지난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텔레비전이 보급됨에 따라 이런 경향은 더욱 강화되었다. 상표가 식별이 안 될 정도로 흐릿하게 나왔던 낡은 흑백텔레비전 대신 컬러 텔레비전을 통해 극적인 스포츠 장면이 서구의 모든 과정에 파고들었다. 낼리는 축구가 가장 매력적인 사업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가장 인기 있는 이 스포츠는 손에 땀을 쥐게 했다. 1930년부터 열린 월드컵에는 사람들이 갈수록 많이 몰려들었다. 축구 열기는 전염병처럼 전 세계에 퍼졌다. 이제 축구는 마케팅장으로 변해 버렸다. -바바라 스미트

앙드레 겔피 덕분에 힘 안 들이고 르꼬끄 스포르티프(Le Coq Sportif)를 수중에 넣은 호르스트 다슬러는 몇 년 전에 르꼬끄 스포르티프를 시장에서 몰아내려고 했을 때처럼 결연히 이 브랜드를 키워나갔다. 가족 간의 긴장이 해소된다면 호르스트는 앙드레 겔피가 제공한 옵션을 언제라도 행사할 수 있을 것이었다. 르꼬끄 스포르티프는 단순한 투자가 아니라 가족과의 관계가 막다른 골목에 이를 때 호르스트 다슬러가 둘 수 있는 마지막 수였다. 호르스트는 르꼬끄 스포르티프를 일신하기 위해 겔피와 공동으로 엄청난 투자를 하려고 했다. 프랑스 시장에서 꽤나 유명했고, 게다가 상품 구색을 완벽하게 갖추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몇몇 운동선수와 축구팀을 후원한 이 스포츠의류 제조업체는 곧 세계 스포츠 비즈니스에서 무시못할 라이벌이 되었다. -바바라 스미트

아식스(asics)는 일본인 기업가 기하치로 오니쓰카가 처음 설립했다. 오니쓰카는 필 나이트가 미국에 내놓은 신발 ‘타이거’를 팔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타이거’는 나이트와 오니쓰카 간의 치열한 법적 다툼의 대상이 되었고, 그 결과 아식스라는 브랜드가 생겨났다. 핀란드의 장거리 선수 라쎄 비렌(Lasse Viren)이 1만미터에서 뜻밖의 우승을 한 후 환호하면서 신고 있던 아식스 신발을 카메라맨들에게 내밀어 이 일본 브랜드는 곧 몬트리올 신문에 대서특필되었다. -바바라 스미트

1962년 일본 여행 때 나이트는 타이거 브랜드의 소유자인 기하치로 오니쓰카와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나이트는 사업가 등록을 한 적이 없었는데도 자신을 스포츠용품 도매상이라고 대담하게 둘러댔고, 즉흥적으로 블루리본 스포츠라는 브랜드를 생각해 냈다. 나이트의 작전이 먹혀들어서 오니쓰카는 미국에서의 타이거 판매 독점권을 나이트에게 넘겨주었다. 이 파트너십으로 미국에서는 싸고 신축성 있는 운동화 수요가 많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나이트는 곧 오니쓰카 하청업체인 한국의 제조업체와 계약을 맺었고, 자체 브랜드를 출시하기로 마음먹었다. 1971년 나이트는 타이거 신발을 모조해서 자비로 시장에 내놓기 시작했다. 나이트는 처음에 새 브랜드 이름을 식스(Six)로 하려고 했으나, 친한 운동선수인 직원이 날개 단 승리의 여신인 ‘나이키(Nike)’로 하자고 제안했다. 이 로고는(디자인 정공 학생 캐롤라인 데이비드슨(Carolyn Davidson)이 고안했다. 데이비드슨은 이 로고 디자인하고 고작 35달러를 받았다) 갈고리를 연상시켰고, 나중에 ‘우시(Swoosh)’라는 이름으로 유명해졌다. -바바라 스미트

80년대에는 나이키뿐만 아니라 리복(Reebok)이라는 새로운 브랜드도 문제가 되었다. 리복은 10여 년 전부터 육상화를 생산해 온 영국 기업인 조 포스터(Joe Foster)가 출시한 것이었다. 사업이 쇠퇴하자 조 포스터의 상속인은 리복이라는 이름으로 새로 출발하기로 결심하고, 영국 이외의 다른 나라에 이 스포츠화를 알리기 위해 도매상들과 제휴했다. 미국에서의 권리는 보스턴 출신의 땅딸막한 기업가 폴 파이어먼(Paul Fireman)이 따냈다. 사업 진척 속도가 워낙 느려서 파이어먼은 거의 파산할 지경에 이르렀다. 파이어먼은 최악의 상황을 막기 위해 영국인 투자자 스티븐 루빈에게 회사 지분의 55%를 팔았다. 그러나 새로운 피트니스 물결이 전 미국을 휩쓸었을 때 파이어먼은 에어로빅용 신발 프리스타일(Freestyle)로 한 밑천 잡았다. 이 새 신발은 아시아의 리복 생산업체가 실수로 장갑 가죽을 사용해서 만든 것이었다. 아시아의 리복 생산업체는 견본을 리복에 보낼 때 신발에 주름이 생긴 것을 사과하고 자동 처리 과정에 들어가기 전에 없애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보스톤의 리복 매니저들은 뛸 듯이 기뻐했다. 리복 매니저들은 이 가벼운 신발로 여성용 스포츠화 시장을 정복했다. 프리스타일은 스포츠 비즈니스에 일찍이 볼 수 없을 만큼 흥분을 불러일으켰다. 리복은 1980년에는 매출이 30만 달러에 그쳤으나 3년 뒤에는 1280만 달러를 기록했다. -바바라 스미트

국가는 스포츠를 통해 흠잡을 데 없이 단련된 신체를 지닌 600만 명을 확보할 수 있다. 국민국가는 필요하다면 2년 안에 이들 중에서 광적으로 조국애에 불타고 매우 공격적인 성향을 지닌 사람들로 군대를 만들 수 있다.(성공적인 스포츠 정책에 대하여) -아돌프 히틀러 [나의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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